2023-06-29 | 관리자 | 조회 816
‘폭행·협박’에서 동의여부로 - 형법 297조 강간죄 개정, 왜 필요할까?
김혜정/오매(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거리캠페인에서 시민들에게 묻는다. “법에서 현행 ‘강간죄’가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 아세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다는 시민들이 많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어요. 폭행·협박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요”라고 알리면 그렇게 정의되어 있는지 몰랐다고 난색을 표하거나 놀라는 이들이 많다.
성교육, 성폭력 예방교육 시간에 배우는 성폭력은 흔히 ‘동의 없이 상대방을 성적으로 침해하는 것’, ‘상대방이 원하지 않음에도 성적 언동을 하거나 괴롭히는 것’이다. 예방교육은 원리와 가치를 전달하고, 따라서 중요하게 구성되는 메세지는 나의 성적 경계도 존중받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방의 성적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이 기본이 된다. ‘여성이라면~’, ‘남성이라면~’으로 시작하는 성별 이분법이나 젠더 역할론에 의존하는 섹슈얼리티 지식과 서사에서 이탈하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이어 법적 강간죄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 순서가 있다면? 교육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지 않았을까 싶다. “법에서는 강간의 개념을 좁고 엄격하게 보고 있습니다” 또 주의하고 당부하게 될 것이다. 법적 강간죄에 대한 설명이 혹여 ‘눈에 띄는 폭행협박만 하지 않으면 성폭력은 걸리지도 문제되지도 않아’라고 이해되지 않도록.
일상의 성폭력과 괴리된, 좁고 엄격한 ‘강간죄’ 요건
현행 강간죄 법은 좁고 엄격하다. 원래 형사처벌을 규정한 법은 엄정해야 하지 않아?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간죄 판단기준은 가부장적이고 구시대적인 관점이 구심을 이루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폭행 또는 협박’은 현행 강간죄 성립의 조건이다. 그런데 무엇이 폭행과 협박에 해당하는가? 무엇이 이 법에 말하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인정되는가? 이에 대해서 판례와 학설은 기준을 마련하고 있다. 여러 형사법 조항에 폭행·협박이 등장하는데 이의 성립을 가르는 네 가지 기준이 있다. 최광의, 광의, 협의, 최협의인데, 최광의 폭행은 ‘평온을 해할 정도의 유형력’을 의미한다. 광의의 폭행, 협박은 ‘의사 결정, 의사활동에 영향을 줄 정도의 직·간접적인 유형력’, ‘공포심을 생기게 할 정도의 해악 고지’를 의미한다. 협의의 폭행 협박은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유형력 행사’, ‘현실적으로 공포심을 느끼게 할 정도의 해악고지’를 말한다. 그런데 강간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최협의’ 폭행협박이다.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유형력 행사 또는 해악의 고지여야 한다.
문제는 무엇일까? 첫째, 강간죄 재판이 ‘피해자에 대한 재판’이 된다. 광의, 최광의, 협의가 힘의 정도와 성격을 사건내용과 맥락을 파악하고 판단한다면, 강간죄의 최협의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행동에 여부가 갈린다. 반항이 불가능할 정도, 현저히 곤란할 정도에 이른 피해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해진다. 강간죄 수사와 재판은 ‘저 피해자는 극심할 정도로 반항하는 피해자가 결코 아니다’라는 결론을 향해 피해자에 대한 이미지, 인상을 만들고, 사건과 무관한 피해자의 생활과 이력을 공격하는 등 온갖 공세가 난무한다. ‘피해자다움’이라는 기준이 탄생하고 작동한다. 강간죄가 보호하는 법적이익이 ‘정조’에서 ‘성적자기결정권’으로 바뀐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렬히 저항하는 피해자라 피해자라는 기준이 여전히 존재하는 셈이다.
둘째, 폭행·협박 뿐 아니라 다양한 폭력을 성애화한다. 피해자의 극심한 저항을 요구하는 기준은, 여성이 협조하지 않으면 성관계는 불가능하다는 ‘화간’ 이데올로기와 쌍을 이룬다. 여성도 원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조금 폭력적인 성관계, 남성이 주도하는 성관계를 여성도 원한다는 ‘강간’신화는 남성중심적인 성문화를 승인하고, ‘힘과 권력’을 성애화한다. 강간으로 신고된 사건에서 가해자/행위자가 피해자의 양팔을 잡고 어깨를 누르면 재판부는 이를 폭행으로 볼까? 어떤 판결은 ‘남녀 성관계 양팔을 잡는 것은 평범한 행위’, ‘폭행협박이라기보다 연인 사이 성관계 모습’ 등으로 쓰고 무죄를 선고한다.
법에는 업무상 고용 감독관계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위력을 이용한 간음, 추행 처벌 조항이 있지만 성인 여성이 신고할 경우 업무상 위력의 특정을 살피기보다 ‘성인 남녀간의 성적 문제’로 바라보는 의심이 크다. ‘극심하게 저항한 경우만 피해 인정’이라는 프레임, 패러다임은 성폭력 판단 전반에 영향을 미쳐왔다. 권력, 불평등, 불이익, 위협, 해악의 예상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남녀간의 성애로만 보는 렌즈가 장착된다.
셋째, 위험을 불사할 것을 조장한다. 많은 여성들의 경우 아는 관계 혹은 친밀한 관계 남성과 있을 때도, 그를 화나게 하거나 그의 뜻을 거스르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지레 뜻을 거스르지 않게 행동하거나,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지속할 때, 그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포기했다는 경험을 흔히 말한다. 성폭력 여부와 다르게 성별화된 ‘두려움’이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성적인 강압이나 침해 상황에서는 ‘신체적으로 저항못할 것 같아서’, ‘목숨을 잃을까 봐’ 포기하고 상대방의 성적인 행동을 그대로 두거나, 어떤 저항도 하지 않거나 정말로 위협과 공포가 클 때는 스스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실행되게 돕는 듯 행동하기도 한다. 현행 강간죄는 이러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차선의 행동을 ‘당신도 같이 협조한 성관계’의 증거로 보고 있다. 생명이나 더 큰 피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보다, 물리적으로 저항해야 피해자라는 것이다. 더 큰 위험을 감수하라고 부당하게 요구한다.
동의 없는 성폭력의 현실을 들여다 보면
강간죄 개정운동은 강간죄 구성요건에서 ‘폭행 또는 협박’을 필수요건으로 삼지 말고 ‘동의’를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그것이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성폭력 법의 보호법익과도 맞는 구성요건이며, 현실의 강간피해 71.4%가 직접적 폭행·협박 없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도 부합한다. 2022년 여성가족부 성폭력안전실태조사 결과에서도 성추행 피해 당시 상황에 대해 폭행이 있있던 경우(복수응답)는 2.7%, 협박은 7.1%에 불과했다. 속임수 34.9%, 갑자기 26.6%, 강요 18.7%, 가해자의 지위(권한, 위력) 이용 16.2%으로 다양한 상황이 존재했다.
원치 않는 성관계를 맺는 경우는 다양한 맥락이 존재한다.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는 2023년 5월부터 6월까지 7번의 릴레이 의견서와 2번의 피해 생존자 글을 통해 ‘술과 약물에 의한 성폭력’, ‘위력에 의한 원치않는 성관계’, ‘성매매, 성착취 상황에서 겪은’, ‘청소년으로서 겪은’, ‘장애여성이어서 겪은’, ‘이주여성으로서 겪은’, 친족관계에서의 원치 않는 성적 경험, 부부라는 이름으로 겪은 원치 않는 성관계의 현실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보고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2022년 <성적 동의에 대한 인식 및 경험 조사>에서도 응답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적 행위를 수락한 이유>라는 질문에 대해 ‘가스라이팅 당한 상태’, ‘앞으로도 내 온전한 느낌과 감정은 무시당하겠지 생각해서’, ‘동의 여부를 답할 겨를도 없이’, ‘불쾌한 행위인지 아닌지 나중에야 인지해서’, ‘이미 안 물어보고 시도하고 있어서 말할 타이밍이 없어서’, ‘아웃팅을 당할까봐’ 등으로 수 많은 맥락과 상황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현실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이 계속 입장하는 법원에서는 ‘동의’를 따지는 판결들도 일부 등장하고 있다. 대법원 2019년 6월 13일 선고 2019도3341은 청소년이 조건만남/성매매에서 겪은 성적 행위에 대해서 원심의 무죄를 깨고 유죄취지로 파기 환송했다. 대법원은 ‘성매매’라는 대표적으로 동의라고 간주해버리는 상황에 대해서 논의한다. “성폭력 범죄에서 피해자에게 이루어진 행위에 대하여 피해자의 동의가 있다는 이유로 범죄의 성립을 부정하는 이유는 그러한 행위는 피해자의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그런데 피해자가 사전에 성매매에 동의하였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여전히 그 동의를 번복할 자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상하지 않았던 성적 접촉이나 성적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거부할 자유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해자에 대하여 이루어진 행위에 대하여 피해자의 동의가 있었는지 여부는 그 행위의 경위 및 태양, 피해자의 연령, 범행 당시의 정황 등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볼 때 그 행위로 인하여 피해자의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구체적·개별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설시한다. “피해자가 성매매에 합의하였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행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거나 또는 이에 대하여 사전 동의를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
동의 여부를 법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동의의 실제 환경이 어땠는지 면밀히 살피도록 하고 있다. 침묵, 신체적 언어적 무저항, 피해자의 지위나 직업, 가해자와의 이전 관계, 피해자의 이전 성적 이력 등이 동의의 자동적인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거나, 가해자가 피해자를 지휘 감독, 보호, 돌봄 하는 위치에 있다면 동의가 아니라고 간주해야 한다는 기준도 보완한다. UN 인권이사회가 2021년에 채택한 UN 강간에 관한 특별보고서에서도 이를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누구나 평등하고 자신인 채로 성적 관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동의 여부로 강간죄 판단기준을 개정하는 것이 성폭력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갑자기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피해자는 여전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히 진술해야 하고, 정황 자료를 찾고 제출해야 할 것이다. 피해자를 추궁하는 듯한 질문도 여전할 수 있다. 형량이 낮다고 느껴지는 문제, 선고 과정에서 가해자의 사정을 봐주는 양형 결정 구조도 여전할 수 있다. 그러나 ‘극렬하게 물리적으로 저항하는 피해자’라는 지극히 좁은 피해자 상을 전제로 그 피해자가 맞는지 질문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동의가 제대로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자유로운 의지로 동의한 상호 성적 행동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장이 열릴 것을 기대한다.
행위자/피고인의 ‘고의 여부’도 쟁점이 될 수 있다. 피해자의 동의가 결여되어 있는 상황을 알고 이용했냐는 것이 쟁점이 될 수 있다. 상대가 동의한 줄 알았다는 주장이나 상황에 대한 왜곡과 과장이 난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성폭력으로 신고된 이들 중 ‘상대가 동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지 않았고 매우 많은 이들이 상대와 합의한 성관계였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따져진 적은 없는 채, 성폭력에 대한 ‘화간’ 통념만을 부추겨 왔다. 이제까지 수없이 가해자로부터 주장되어 온 ‘상대방의 동의’가 정말 그러했는지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술과 약물 상황에서, 업무상 위력상황에서, 성매매 업소에서, 장애여성으로서, 이주여성으로서, 부부관계 내 상대방이 정말로 동의했는지, 동의할 수 없었는지, 표현을 할 수 있었는지 하기 어려웠는지 살피게 되길 바란다.
이 전환이 바라는 것은 처벌의 대상,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가 되고 싶은 사람, 성폭력 고소인이 되는 것이 희망사항인 사람은 없다. 강간죄 개정이 지향하는 것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신인 채로 성적 관계를 경험하는 사회다. 연령이 어떻든, 지위가 어떻든, 장애여부가 어떻든 성적인 관계가 생길 때 의사를 정확하게 묻고, 대답할 수 있고, 이것이 조건 없이 수용되고, 어떤 대답이든 불이익과 불리한 상황이 생기지 않는 사회 말이다.